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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年1月1日

촌민 3천명을 일본군이… – 중국 평정산 사건 –

민의련 50주년 기획 평화와 의료 복지를 배우는 아시아 여행

2003년 6월에 창립 50주년을 맞은 전일본민의련은, 2004년 가을 <평화와 의료 복지를 배우는 아시아 여행>을 주최. 민의련의 지지연대시민그룹인 공동조직 여러분들과 민의련 직원이 참가하여, 베트남(9월 16일∼21일), 중국(9월 18일∼22일), 한국(10월 10일∼15일), 이렇게 3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가해의 사실을 배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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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산사건으로 희생 된 마을의 모형 앞에서 사건의 개요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중국코스(단장 히다 유타카, 전일본민의련회장)는 24세부터 32세까지의 젊은 직원 5명을 포함해 총 23명. 중국동북부의 3개 도시 요녕성의 심양과 대련, 흑룡강성의 하얼빈을 돌면서, 전쟁의 역사를 전하는 3개의 자료관인 평정산유적, <9.18>역사박물관, 일본군 제731부대 죄진관과, 위생국 및 병원 등 4개의 의료관련기관을 중심으로 방문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들은, 발전도상에 있는 중국의료사정을 배우기도 하고, 마치 존재하고 있지 않은 듯한 중국의 교통법규 및 도쿄를 능가하는 거리의 활기에 놀라면서 다양한 중국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역시 <일본의 근현대에 있어서의 ‘가해’의 사실을 배운다>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해의 측면을, 우리들 청년들이 너무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가해를 입은 쪽의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왔는지 하는 것을 말입니다. – 그런 생각들을 강하게 느끼게 해준 것이 <평정산유적>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토사로 마을 전체를 덮어 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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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있는 사람을 마치 지키려는 듯 서로 겹쳐 있는 두 구의 유골. 부모와 자식 혹은 부부였을지도.

<평정산유적>은 우리들 일행이 최초의 방문지로서 들른 곳입니다. 1932년(소화 7년) 9월 16일에 일어난 일본군의 촌민참살사건, <평정산사건>의 사실을 지금에 전하는 시설입니다. 여러분은 <평정산사건>에 대해 알고 계신지요.

중국에 침략의 손길을 끝없이 뻗어나간 일본이 본격적인 중국침략, 식민지화를 추진하게 된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중국에서는 ‘9. 18사변’이라고 불려짐)으로부터 얼마 안 있어 1년을 맞이하는 그 날, 만주사변이 일어난 심양시의 인근시, 무순에 있는 평정산 기슭의 작은 마을을, 일본군이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군에 저항한 비족이라 불리는 중국인들에게 애를 먹고 있던 일본군은, 촌민이 비족에게 가세하고 있다고 하여, 어린 아기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촌민 3천여 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총이나 칼로 죽인 뒤, 사건을 어둠 속에 매장시키기 위해 사체에 불을 놓고, 심지어는 토사로 마을 전체를 덮어 숨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사건 현장은 전후에 이르러 파헤쳐지고 시설도 지어져, 평정산유적으로서,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폭은 수 미터, 길이가 백 미터 정도 되는 부지에는, 셀 수 없는 상당량의 유골이 무참하게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전시를 위해 가져온 것이 아닌, 사건 당시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탄이 관통한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난 두개골, 정면으로부터 총탄을 맞았는지 양어깨가 펼쳐진 모습으로 쓰러져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해골, 어린아이로 여겨지는 작은 해골을 지키려는 듯 그 위를 감싸 덮은 해골… 지금은 뼈로만 남아 있으나, 그곳에 살이 붙고 옷이 입혀져, 얼굴에는 공포와 고통으로 고심하는, 또는 잔인한 일본군의 행위에 대한 분노의 표정이 있었던 것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잔학한 사건이 중국 각지에서 일어났던 것은 지식으로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사진 등을 본 적은 있었습니다만, 이러한 학살의 현장을 앞에 하고 보니, 얼굴은 들고 있어도, 눈의 초점을 맞춰 직시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충격적인 광경에 가세하듯 우리들의 눈에 달려드는 것은, 사건현장에 걸려 있는 ‘도살’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촌민들이 일본군에게 인간으로서가 아닌 소나 돼지 같은 동물처럼 살해된, 그런 느낌을 이 말에 실어 전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절한 기억을 체현한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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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한 진료소(대동구중서결합진료소)에서. 의사를 포함해 직원11명 전원이 여성.

가해의 사실을 목전에 놓고, 우리들은 과연 일본의 전쟁피해와 비극에 대한 호소가 세계, 특히 아시아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전쟁에서 피해를 입고, 비극을 맛본 일본인의 비통한 기억은, 체험한 바 없는 우리들의 상상을 넘는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피해를 말하기에 앞서 가해는 어떠했는가 하는 질문은 실제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이 감히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들 일본인이 역사로부터 계승하고 배워야 하는 것은, 전쟁으로 인해 피해 비극을 입는 것도,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도 모두 안 된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피해자도 가해자의 입장에도 두 번 다시 서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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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로 가져간 헌법9조가 새겨진 민의련의 부채는 대 호평. 대련철도병원에서 사무장(왼쪽)과 전 원장(중앙)에게 직접 전하고 있는 히다 유타카 회장

이러한 것들을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함과 동시에, 이러한 마음을 체현한 것이 <일본국헌법> 전문과 9조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여행이었습니다.

모리 다카시 (전일본민의련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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