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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年1月21日

언제나 건강 2009년 12월 민의련 강령 – 여기에 그 힘의 비밀이 – 5 키워드: 민주적인 운영을 관철시켜 사업소를 지킨다.

민의련의 사업소는 현재 1754개소, 7만명을 넘는 직원들이 전국에서 의료와 개호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과 규모는 서로 달라도, 같은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민의련 강령>입니다.
1961년에 정해진 이후 반세기를 거쳐 온 강령의 버전업을 도모하고 계획중인 이번 기회에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민의련의 참모습을, 강령의 키워드로부터 따라가 보고자 기획한 시리즈. 그 다섯 번째는 <민주적인 운영을 관철시켜 사업소를 지킨다>입니다.

도산에서 재건으로 새로운 다짐
― 야마나시 근로자의료협회 (근의협)

1983년 4월 5일, 야마나시 근로자의료헙회(근의협)은, 부채총액 230억엔을 안고 돌연 도산. “의료기관에서 사상최대의 도산”으로 보도되어,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후 여러가지 고난을 넘어서 재건을 달성한 야마나시 근의협. 그로부터 26년, 야마나시를 방문했습니다.

경영에 대한 사고에 잘못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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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의 방해도 있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젊은 오하타 원장의 모습도 있다 (왼쪽으로부터 2번째)

“ ‘도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정말 한줌 정도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몇 안 되는 경영간부뿐. 거의 대부분의 직원은 몰랐다는 것이…” 도산당시, 4년차 의사였던 오하타 카즈요시 원장(코후 공립병원)은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부채총액 230억엔 중, 117억엔이 7700명의 호조(상호부조) 회원 – 나중에 토모노카이(친우회)로 명칭이 바뀜 – 으로부터의 협력채권. 당시의 전무이사는 독단으로 “의료는 돈을 벌 수 없다”며, 본업을 탈퇴, 부동산회사 등 20수개 회사에 약 121억엔의 투자융자를 실시한 후 회수불능 상태가 된 것이 도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조직의 약한 기반도 드러났습니다.
“직원 한명 한명이 경영에 관여한다는 의식이 희박했습니다. 의사는 의료, 경영은 경영간부에게 맡기면 된다고 하는, 자기 책임만 다하면 된다고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약한 조직력이 되돌릴 수 없는 사태를 낳았던 것이지요”라는 오하타 원장.
“예를 들어, 의료기기를 살 때도, 목소리가 크고 영향력이 큰 의사의 의견이 통했지요. 어떤 의료를 해야 하는가, 계획성을 가지고 설비를 갖춰나가는 의식이 의사집단에도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화의에 의한 ‘재건’을 선택

도산이 확실시되자 “돈을 돌려달라”는 채권자 ‘호조회’ 회원들이 코후공립병원에 쇄도. 울며 쓰러지는 채권자들 앞에서 직원은 “(병원의) 의료가 계속되면 반드시 돌려드릴 수 있다” 고 설명하면서 재건을 다짐했습니다.
야마나시현은 야마나시 근의협(근로자의료협회)의 도산에 대해, 검토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재건은 무리라며 ‘파산’을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야마나시 근의협은 ‘화의’에 의한 재건을 선택. ‘채권자의 권리, 민의련의 의료, 직원의 생활’을 지킨다는 스로건을 내걸고, 바로 사죄와 설명을 기본으로 한 ‘채권자방문’을 개시했습니다
당시, 채권자의 한 사람이었던 야마나시 건강친우회(토모노카이) 모치즈키 유우 사무국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채권자 중에서는, 신뢰를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역주민과 함께 추진해오고, 환자들의 관점에서의 따뜻한 의료가 근의협에 있었던 것도 사실. 채권자의 집에 몇번이고 방문해 정중히 경과를 설명하고, 앞으로의 사업계획을 설명하는 직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재건에 거는 열의가 점차적으로 불신감을 극복해 갔습니다. ‘이 병원을 망하게 해서는 안된다’ 고 하는 목소리도 커졌갔습니다. 직원들도 정말 끈질기게 분발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음해 5월, 15년에 변제하는 것을 조건으로, 채권자의 99. 9%의 동의로, 화의가 성립되었습니다.

재건을 향한 커다란 일보

화의 성립 후, 야마나시 근의협은 도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총괄하여, 재건을 향한 장기계획도 만듭니다. 채무 변제 도상의 93년 7월에는, 지역의 요구로 새롭게 류오공립진료소를 설립. 개설에 관여한 모치즈키씨는 “도산후 처음으로 개설하는 진료소였기 때문에, 커다란 핸디캡이 있었다. ‘빚도 변제하지 못한 상태인데, 괜찮겠는가” 며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지역에 나가 우리들의 지향하는 의료를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동지들을 늘려나가는 것이 재건을 향한 커다란 일보가 되리라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오오하타 원장도 “도산후 10년에 새로운 진료소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 직원에게는 커다란 자신감이 되었다. 근의협이 드디어 지역에 받아들여져 반드시 재건할 수 있다고 하는 확인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전국의 지원도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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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을 이뤄낸 2002년, 새로운 병원도 완성

야마나시 근의협은 97년 4월 30일, 예정보다 1년 앞당겨 채무를 완전히 변제합니다. 재건의 커다란 힘이 된 것은, 채권자, 환자들, 공동조직 등 지역분들의 협력 이외에도, 전국의 민의련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성금 등의 재정적인 지원은 물론, 간호사 등이 전국으로부터 1천명을 넘는 민의련의 동료들이 의료지원을 하러 와주었던 것도 힘이 되었다. 연말보나스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홋카이도에서는 직원 한명 한명에게 연어를 한마리씩 보내온 적도 있었습니다. 전국의 동료들로부터의 격려에, 저도 ‘역시 이 지역으로부터 민의련의 등불을 꺼뜨릴 수는 없다’고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요”라며 오하타 원장은 눈시울을 적셨다.

모두가 경영을 주시한다는 관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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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부터 모치즈키 씨, 사이토 씨, 오하타 원장.

도산의 교훈은 직접 체험하지 않는 세대에게도 계승되고 있습니다 취직직후, 코후공립병원의 경리에 배속되었을 때 상사로부터 도산 이야기를 들었다는 원무과 3년차 직원이었던 사이토 아야씨는 “좋은 의료를 하는 것만으로는 의료기관은 지켜지지 않는다. 경영을 확실하게 주시해나가는 관점을 누구든지 갖지 않으면 말이야” 하는 이야기를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사이토 씨는 “도산을 극복한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이 있다. 이번에는 우리들이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강령을 깊이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도, 선배들과 토모노카이 공동조직 여러분들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
“경영면만을 고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야마나시를 민의련으로서 새롭게 재생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재건의 과정에서, 우리들은 전국의 동료들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는 오하타 원장.
모치즈키씨도 “강령개정안에 ‘공동조직과 함께’라고 하는 말이 명기되어, 민의련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우리들도 파트너로서 운영에 관여하고, 이제부터도 야마나시근의협을 계속 지켜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글/ 이노구치 소우
사진/ 사카이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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